소나기를 맞으며 거리를 달린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후덥지근한 여름 길을 걷고 있는 준석의 모습이 처량하다. 1주일 전만 하더라도 그는 양복을 입고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을 테지만 지금 그에게는 양복을 입고 출근할 회사가 없다. 실직 이후로 집 나서기를 꺼려하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향하는 중이다.
은행 문을 힘없이 밀고 들어간 준석은 현금인출기로 다가가서 카드를 집어넣는다. 잔액 55만 원... 이번 달 아내의 월급도 거의 바닥인 것이다. 그가 현금카드로 인출한 만 원짜리 지폐로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지갑의 배를 채워주고, 은행 문을 나서자 굵직한 물방울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준석은 이 불 청객의 방문이 짜증스러웠지만 집에서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기 대문에 하는 수 없이 불청객이 될수록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며, 은행 입구에 서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웅덩이에 튀는 것을 권태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소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났다. 급하게 소나기를 피할 장소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 위로 신문이나 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머리 위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급히 뛰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준석이 "뭐가 저리도 급할까?"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한 가지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아내가 그에게 현금카드를 쥐어주면서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여보, 사촌 여동생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야 하니까 돈을 찾자마자 빨리 와야 해요."
"몇 시까지 집에 오면 되는 건데?" "최소한 12시까지는 와야 해요."
준석은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은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분침은 딱 50을 건너뛰고 있었다. 은행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소나기는 아직 볼 일을 다 보지 못한 듯하였다.
'그렇다. 뛰어야만 한다. 현재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산성비에도 손상되지 않는 나의 질긴 머리카락과 짤막하지만 지칠지 모르는 다리밖에 없다.' 하고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한 준석은 은행 입구에서 빗방울이 무차별 낙하하는 길거리로 뛰어들었다. 뛰기 시작한 지 한 2분쯤이 지났을까? 도저히 지금의 속도로는 시간 안에 집에 도착하지 못할 듯하였는지 준석은 잠시 멈추어 서더니 슬리퍼를 벗어 각각 왼쪽 손과 오른쪽 손에 쥐어 잡은 후에 다시 뛰기를 시작하였다. 길 중간중간에 보기 흉하게 패인 자리에 생긴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 달리는 그의 모습은 한국의 칼 루이스였다.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나 OOO동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그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은 12시를 아직 넘지 않았고 분침은 57과 58 사이에서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계단을 튀어 올랐고 '402호'앞에 도착하였다. 숨을 가다듬은 준석은 검지 손가락을 초인종에 올려놓았다.
"딩동, 딩동"
"네~나가요."
문이 열리자 아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맨발에 옷이 다 젖은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준석의 모습이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12시까지 와야 한다고 해서... 뛰어왔어... 사촌동생 결혼식 축의금을 내야 한다고 해서..."
"그럼 그것 때문에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뛰어 온 거예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사촌동생이 야외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다음 주로 결혼식을 연기했다고 전화가 왔어요."
아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준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의 떨리는 입술에서 알아듣기 힘든 말이 새어 나왔다.
"삶은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
준석의 몸에 젖게 한 불청객 소나기는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거리에 얇게 고인 웅덩이 만이 준석과 불청객 소나기를 기억한다.